“빛도 목소리도 없는 그곳에서”
견디려는 두 사람이 나온다. 어느 순간 말을 잃은 여자와 선천적인 병으로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 여자와 세상 사이에는 침묵이 놓여 있다. 타인이 날카롭게 헤집어 놓은 언어의 더미에 여자는 맞섰고, 맞설 때마다 무너져봤다. 그녀는 모국어로 더 맞서지 않는다. 남자는 세계를 건널 때마다 어둠을 견뎌야 한다. 그는 볼 수 있는 세계를 잃어가고 있다. 남자는 희랍어를 가르치고, 여자는 희랍어를 배운다. 서로 본다. 완전하려고 하면 부서지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가 안다.
침묵 속에서 어어, 우우, 하는 분절되지 않은 음성으로만 소통하던 인간이 처음 몇 개의 단어들을 만들어낸 뒤, 언어는 서서히 체계를 갖추어나갑니다.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언어는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습니다. (...) 정점에 이른 언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디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좀 더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변화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쇠퇴이고 타락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의 유럽어는 그 오랜 과정을 거쳐 덜 엄격하게, 덜 정교하게, 덜 복잡하게 변화한 결과물입니다.(29쪽)
덜 엄격하고, 덜 복잡한 언어 이전에 극도로 정교한 희랍어가 있었다. 희랍어 이전에 침묵이 있다. 언어를 되찾기 위해 여자는 희랍어로 애쓴다. 남자는 시린 눈을 뜬 채 보지 못한 것과 듣지 못한 것을 참으며 기다린다. 소멸하고 있는 두 사람은 죽은 언어 희랍어를 붙들고 만난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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